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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0:1-11 "미국에 온지 7년째 되는 날" (강호)

글쓴이 : admin 날짜 : 2017-01-17 (화) 15:17 조회 : 258
시편 40:1-11
1.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네.
2.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진흙탕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3. 주님께서 나의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담아 주셨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네.
4.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
5.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시며, 우리 위한 계획을 많이도 세우셨으니, 아무도 주님 앞에 이것들을 열거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널리 알리고 전파하려 해도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6. 주님께서는 내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습니다.
7. 그 때에 나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8.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9. 나는 많은 회중 앞에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아시듯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10.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의를 나의 가슴 속에 묻어 두지 않았고, 주님의 성실하심과 구원을 말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그 미쁘심을 많은 회중 앞에서 감추지 않을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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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가 일기 형식이라 먼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한 날이었던지라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2017년 1월 16일
오늘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어떻게 보면 히스테리컬하게 미루던, UMC 안수과정의 첫단추를 끼우기 위한 이메일을 감리사에게 보냈다. 신기하게도 이메일을 보내놓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불현듯 오늘 (1/16일)이 내가 미국에 처음 유학온 날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 길로 2010년도 일기장을 컴퓨터 파일에서 꺼내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원래는 지난 금요일 즈음인가 편지 내용을 다 작성했었고, 아내의 프룹리딩을 한번 받고 보내려고 했었다. 아내를 재촉하면 충분히 그럴수 있었을테지만 왠지 모르게 시간을 조금 더 두고 여유있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것이 오늘이 된 것이다. 아무튼 신기하지 않은가? 사람이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알람을 맞춰놓아도 놀랍게도 알람이 울리기 바로직전에 눈이 번쩍 떠지는 일이 있듯, 즉, 생체 시계가 놀랍게 작동하듯,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리고 따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오늘 1월 16일이라는 날에 목사 안수과정의 첫시작을 시작했다는 것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시계가 분명 작동하고 있음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믿음이다. 

그러면서 지난 7년을 잠시 되돌아보게 된다. 아니 미국에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특별히 오늘 저녁에 아내와 함께 교회력에 따라 읽은 말씀, 시편 40:1-11은 말씀 전체가 내 개인적인 고백처럼 들렸다. 말씀을 읽기전 오늘의 말씀이 무엇일지 기대감이 분명 컸었다. 하나님은 분명 성경을 통해서 강력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문을 읽으며 더더욱 오늘의 이 시간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구나를 절실히 느낄수 있었다. 그 섭리하심은 어제 이사야 49장에서 읽었듯, 나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 이미 모태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조금 곁길로 가서 목사 안수는 사실상 이미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때 받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아버지의 영향도 컸겠지만 어렸을때부터 나는 장래희망에는 항상 "목사님"이 1순위였다. 물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달라지기는 했지만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목사가 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은 조금은 열어두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2009년 회심 사건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는 결국 신학교로 오게된 것도 물론 꼭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목사가 될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초등학교 3학년 내지 4학년으로 돌아가서 때는 바야흐로 내가 광림교회를 다닐 적이다. 무슨 큰 부흥집회였던것으로 기억하는데 집회가 말미로 흘러갈때쯤 당시 김선도 목사님이 좌석에 앉은 성도들을 향해 이중에 앞으로 목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단상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자신이 안수를 해주겠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엄마와 같이 앉아있었는지는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다. 다만, 목사님이 부르실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나 스스로 결단하고 나갔던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어떻게 안수받았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분명한건 그 때 엄마에게 등떠밀려서도 아니고 자발적인 의지로 많은 회중들 앞에 나가 앞으로 목사가 되겠다며 안수를 받았었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 때 안수받은 사람은 나혼자만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 때 가장 어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처럼 목사 안수는 나에게 멀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상 나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또다시 목사안수를 받지 않아도 된다거나 받지 않겠다는 의지는 아니다. 핵심은 그만큼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단순히 7,8년전 나의 회심사건에서부터만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이다.

다시 7년 전으로 돌아가겠다. 오늘 읽은 시편 40편 말씀은 가히 내 고백이라고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었다.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네."

먼저,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다'라는 첫부분부터 내게 크게 와 닿았다. 불확실한 내 상황, 불확실한 내 존재이유, 불확실한 내 (신학적/철학적) 색깔, 불확실한 미래 등 모든 것이 뿌연 안개 속 상황처럼 답답하고 갈길몰라 방황하던 나, 그러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해가시겠지, 아니 그분이 가장 선한길로 내 삶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랬었다. 이 때문에 기도도 많이 하고, 때로는 역정도 내기도 하였고, 또한 이런 나를 위하여 주변의 여러사람들 (가족 포함)께서도 많은 기도와 지원을 해주셨고, 아직도 그런 지원을 받고 있다. 

'내가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다'를 다른 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내 불확실한 상황 속에 결국 내가 붙잡을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진흙탕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주님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그것은 미국에 오기 전 일이니 약 7년 반 전쯤 일이라고 봐야 한다.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인가부터 음란과 탐욕, 방탕과 위선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를 건져내주셨던 사건이 바로 내 회심사건이었다. 그런것들에 대한 회의와 진절머리를 느끼게 하셨고, 그러한 삶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열정을 품게하셨다. 바로 그 사건의 일환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신학교로 7년 전 오늘 건너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구절에서 드러나듯, 멸망의 구덩이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바로 '목욕탕'으로 인도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되려, 지난 7년간 나는 '진흙탕'에 빠져 있었다고 봐야한다.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 거리듯 과연 내 정체성은 뭔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회의와 불확실함 속에 휩싸여 있었던 셈이다. 멸망의 구덩이로부터는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나를 구해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설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단편적으로는 알지만 전체적으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목사 안수과정을 무기한으로 지연시키던 것 역시 진흙탕에 있던 나와 관련한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오늘로서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목사 안수과정을 시작했다는 것은 바로 내가 빠져 허우적 거리던 진흙탕에서 벗어나는 사건이었음을 의미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내 온몸에는 진흙으로 뒤덮여 있다. 생각해보라. 지난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 지긋지긋한 진흙탕 속에서 뒹굴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 말씀 5절과 같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하도 많아 일일히 열거할수도 없을만큼이라고 고백하듯, 지난 7년이라는 시간동안 (사실상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 전체) 그분의 계획하심 속에 구.비.구.비. 내가 뒹굴었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하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일일히 여기서 열거하지 않겠다. 열거할수도 없거니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환란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을 낳는데 바로 그 희망은 다름아닌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듯, 지난 모든 나의 구비구비의 삶의 경험들이 결국 내게 남겨준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에 대한 더 큰 확신이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것은 곧, 그분의 말씀(성경말씀)에 대한 더 큰 확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에 대한 더 큰 확신이며, 이 땅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는 확신인 것이다. 나로 하여금 목사 안수과정에 첫발을 내딛게 한 용기는 다름아닌 나의 '불확신'이라는 진흙탕에서 벗어나 '확신'이라는 반석위에 설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확신'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얼만큼 '확신'에 차있는가 의문이 들긴하다. 볼 수 있으면 보라. 아는 사람은 안다. 아직 내 온 몸은 진흙으로 뒤덮여 있다. 지금의 확신이 베드로의 배신으로 탈바꿈할수도 있기에 사실상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더욱이 '목사 안수과정 시작'이라고 input하기는 했지만 '목사 안수 받음'라는 output으로 나올지는 두고봐야 알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상 하나님은 내게 더 작아지신 분이 아니고, 더 큰 존재로 자리잡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불신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더 큰 신뢰의 대상이 되셨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나를 이 반석 위에 서게 하시고, 지금 이 반석위에 걸어가는 내 걸음을 안전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소망한다.

오늘 말씀에서 놓칠수 없는 부분은 두가지가 더있다. 하나는 6절, "주님께서는 내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는 부분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유독,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들을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명작이랍시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어준다고 해보자. 그 갓난 아이가 소리는 듣겠지만 그것을 하나라도 이해할수가 있겠는가. 이 말은 즉,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자신의 말을 깨달을수 있는 지혜와 지식이 선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 들을수 있는 귀 즉 지혜와 지식을 "주님께서"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선행되는 은혜를 의미한다. 

이 의미가 더 분명해지는 것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서 찾을수 있다. "주님께서는 내 두 귀를 열어 주셨다"라는 말씀에 바로 이어서 이런 말씀이 등장하는데 첫인상은 좀 매끄럽지 않다.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습니다." 뭔가 불협화음같지 않은가. 하지만 하나님의 선행되는 은혜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외형적, 형식적 틀(소위, 신앙의 경륜, 직분, 헌금 액수 등) 이 아닌 두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어떠한 삶의 자리에서도 그분을 향한 확신 (그것을 다른 말로는 사랑)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바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내 삶에 적용해서 생각하면, 내가 지난 삶의 흔적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확신이 더 생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확신과 지식으로 집을 짓고 안주하면 안된다. 주님의 은혜로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되었다면 이제는 걸어야 하는 것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고, 더 뿌리 깊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이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주님께서 내 두 귀를 열어 주셨다". 기억하라.

또 한가지 오늘 말씀에서 놓칠수 없는 것은, 7-8절에 있다. 앞부분이 소위 '은혜'에 해당한다면, 이부분은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기독교사에서 오랜시간 논쟁이되고, 아직까지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바로 '은혜-행위'가 여기서도 등장한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분명 은혜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고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내 입에 감이 떨어져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감을 원하면 감나무 밑에 가야 한다. 감이 입에 떨어지기 원하면 감나무 밑에 누워 입이라도 벌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비유가 얼마나 적절한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말씀에서도 드러나듯, 하나님을 더 알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더 알고 신뢰할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 하나님을 더 신뢰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아주 간단한 논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듯, 은혜가 은혜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즉 하나님을 더 알고 그분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을 읽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니, 성경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주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에서 배울수 있는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보여줬던 다윗의 고백이었음을 주목하라. 

이것을 내 상황에 접목해서 생각해보면, 지난 7년만을 놓고 볼 때, 진흙탕에서 뒹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 가운데 신학교에서 수학하게 되고,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고, 믿음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세우는 자리로 이끌림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되며, 그럴수록 더 분명해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내며 그것을 삶의 자리에서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실천해나가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되는 단계로 나아가며, 그분을 위한 열심과 열정을 더 가지게되는 것을 몸소 경험함으로써 말씀의 능력을 새삼 더 체감하는 바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그분의 일하심을 증거하며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내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유학온지 7년째 되는 날, 목사 안수 과정을 시작하였다. 기도하기는 이 과정을 통하여서 목사라는 정식 타이틀 (즉, 형식)을 취득하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다른 무엇보다, 이 과정을 밟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두 귀를 계속해서 열어주셔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전폭적으로 더 커지기를, 그와 동시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더 큰 사모함과 깊은 묵상이 이뤄지기를, 그리고 그것을 통해 깨달아진 말씀을 더 열심히 삶의 자리에서, 교회에서 녹여내기를,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쏟아부을수 있는 열심과 열정이 더 타오르기를 기도한다. 그러면서 내 삶속에 점점 더 커져가는 하나님, 그분의 흔적,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온 회중앞에 선포하며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를 위해 기도한다. 

끝으로, 오늘 본문 11절로 글을 마친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 

아멘.


admin 2017-01-20 (금) 00:31
전도사님의 고백적인 묵상, 그리고 결단을 축복합니다.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이 전도사님을 언제나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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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2017-01-22 (일) 00:13
먼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곁에서 목사님의 기도와 지도를 받을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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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2017-08-05 (토) 07:00
저도 조금만 있으면 미국갈거 같아요
그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기대됩니다 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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