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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글쓴이 : walter 날짜 : 2016-05-09 (월) 10:45 조회 : 248

머니!

                                                              Walter Ilho Park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었던 당신의 막내아들에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8년 미국으로 처음 떠날 때 어머니를 영원히 만나지 못할 줄은 몰랐다.

숙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걸까. 조선조에 태어나서 별난 남편과 더 유별난 6남매를 성장시키신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역경은 내가 섣불리 입에 올리기조차 두렵다.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입으로 직접 말씀을 하실 일이지 내가 무엇을 안다고 ‘우리 어머니는 이렇고 저랬다.’고 나설 자격이 없다. 침묵이 어머니에 대한 예우다. 나는 미욱한 한 마리 거미새끼일 뿐이다. 어머니와의 가슴 에이는 사연은 건드리면 용암처럼 터져 나와 이 세상을 슬픔과 눈물로 덮을 것 같아 가만 덮어두고 비껴가고 싶다.

어머니의 본가는 영덕군 지품면 원전 2동 속칭 쟁골(재곡)마을로 불리는 평택 임(林)가 집성촌이다. 임의관(林議官)댁이란 택호(宅號)로 불렸던 한학자 집안의 딸만 셋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나 분한 마음에 분월(粉月)이라고 외할아버지가 작명했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출생지 쟁골은 태백산맥 남단 영남북부 산악지대에 우뚝 솟은 영양 일월산을 주봉으로 삼고, 내륙으로 갈래갈래 뻗어 내려오든 산줄기 하나가 계곡천을 만나 가파르게 서 버린 험준한 배산 임수의 산비탈 마을이다. 마을 뒤쪽은 45°사각의 악산(嶽山)이 내려다보고 있다. 마을 앞 30-40미터 전방은 70-80°경사의 가파른 산 능선이 시야를 가로막고 계속 뻗어간다.

마을 오른쪽 옆구리만 터진 응달진 협곡에 위치한 찻길에서 5리 들어가는 후미진 마을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외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간 후 이었으나 외가댁에는 어머니의 사촌이 양자(養子)로 대를 이어 살고 있어서 어머니를 따라 외가댁에 다녔다.


산비탈에 층계를 이룬 40여 호의 가옥 중 맨 뒤쪽 언덕에 덩그렇게 홀로 올라앉은 격절(隔絶)의 집이었다. 집 앞 골목 어귀에는 우람한 호두나무, 오동나무가 줄 지워 서있었다. 집 뒤뜰에 오얏 나무와 웅장한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앞마당에는 고목 감나무가 여러 그루 돌담을 끼고 서있었다. 토종 벌통 여러 개가 양지바른 처마 밑에 놓여 있어서 꿀벌들이 쉴 새 없이 작은 구멍으로 드나드는 것을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


마당 가장자리 가파른 절벽아래는 계곡 폭포가 있었다. 높은 절벽에서 내리 쏟는 물줄기가 암석 위에 떨어져 물보라를 날리며 고여 있을 웅덩이를 찾지 못하고 연이어 낭랑한 물소리를 내며 급류를 타고 흘러갔다. 깊은 밤 협곡을 처량하게 울리는 폭포의 낙수 소리와 그 마을에 미망인이 많은 사연과 연관성이 있다는 전례 애화(哀話)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20세가 되어 산 너머 마을로 시집을 올 때까지 바위에 떨어지는 처연한 그 물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어머니의 태생지이며 내 모태의 원향(原鄕)의 산기(山氣)와 물소리가 내 심성에 배어있다. 나는 생김새와 성격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부면모심(父面母心)이 아니라 나는 모면모심 쪽에 가깝다.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의 마흔 전 생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없다. 짧은 기간 함께 산 기억들과 얻어들은 말, 미루어 짐작으로 알뿐이다. 어머니는 조부모․할머니․고모 다섯과 대 농가의 농사일․정미소․배급소․한지생산 공장에서 일 돕는 사람들의 식사 치다꺼리와 아들 다섯 딸 하나 치성하느라 자리에 앉을 시간이 없었다. 고모님 다섯 어머니 손을 거쳐 시집을 갔다면 고역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머니는 한글을 활용할 정도의 학식이었지만 지혜와 양식이 있었다. 한 때 한국사회에 문맹퇴치 운동이 일어났을 때 농촌 마을마다 결성한 부인회 회장에 선출된 적도 있었다.


해방 후 대구로 이사를 나갔을 때, 40년 농촌에서 살던 생활 습관이 생소한 도회지에 익숙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골언어, 도시의 생활용어가 다르고 부엌에서 사용하는 일상 도구들도 시골과 도시는 문물의 격차가 심했다. 라이터 사용법을 몰라 아침이면 잠자는 아들을 깨워서 부엌 아궁이 불을 지폈다.


시골에는 없는 도회지의 통행금지제도를 ‘통행금지’인지 ‘통행금전’시간인지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말해 우리들을 웃게 했다. 짜장면 같은 비 토속적 음식, 기름기가 많은 음식은 잘 입에 대지 않았다.


중학교 고학년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딸 네 명 아침 학교 갈 때마다 학비 달라며 손 벌리는 자녀들을 위해 한복 바느질로 학비를 보탰다. 형이 입던 교복을 줄이고 늘려서 동생들이 대를 이어 입을 수 있도록 표 나지 않게 새 옷으로 만들어 내놓는 데는 신기에 가까운 솜씨이었다.


어머니는 “양반의 상징은 봉재사(奉祭祀) 접빈객”이란 정신을 철저히 지켰다. 시골에서 잘 살든 때만 생각하는 집안사람들이 대구 나들이 때면 며칠씩 묵고 가는 식객들이 줄을 이었다. 나의 이종, 고종, 외사촌들이나 대구에 유학한 친척들은 대부분 몇 달씩 혹은 해를 넘기며 기식했다. 찾아오는 손님 대접은 언제나 극진했다. 내게 인간적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 것이다.


6,25 전란을 맞아 첫째, 둘째 아들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나가고 남은 아들들은 피난길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는지 죽었는지 서로 소식조차 끊긴 체 어머니와 누나와 젓 먹이 여자동생 여자 셋만 대구 집을 지켰다. 그 때가 어머니 생애의 노심초사 절정기이었다.

전란이 끝났을 때 아버지 어머니는 전쟁터에 나갔든 아들 둘 살아남았다는 것과 남은 자식들 부상당하지 않은 것만도 큰 행운이며 축복이란 말을 여러 번 했었다. 몸 성한 것으로 전쟁터와 피난지에서 고생한 것을 위안 받긴 했지만 살아남은 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자식 복


6. 25가 끝났을 때 그 때부터 자식들이 순서대로 졸업하고 제 치레 할 때까지는 어머니의 소임은 무거웠다.

어머니는 자식들만 껴안고 사느라 당신의 남편과는 형식적인 부부이었다. 아버지와는 1-2년에 한번 서로 마주치기가 어려운 별거생활이었다. 세상에 그 누가 자식 잘되라고 정성 드리지 않는 부모가 있으랴만 우리 어머니는 오직 자식을 위해서만 살았다. 어머니는 산 같은 무게 중심을 지녔다. 기쁨도 슬픔도 감탄사가 없었다. 몸이 불편하다고 자리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본적이 없다. 인내의 화신(化身)이었다. 없으면 허리띠를 졸라매었지 구걸하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헌신적 모성애에 비례할 만한 자식 복, 남편 복, 세상 부귀영화 복이 없다면 누구도 결혼하여 자식 낳아 양육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이 기대에 부응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속을 무던히 썩였다.

우리 아들 형제들은 어머니에게 ‘몸서리나는 유별난 자식들’이었다. 우리 형제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사고들로 집안에 바람 잘 날 없었는데 이 사고들을 가능하면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수습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그 ‘유별난’ 자식들이란 표현은 헛말이 아니다.


자식 흔한 집안의 여섯째인 나는 워낙 어려서 형들에게서도 시골촌놈취급을 받고 아들 계산에서도 제외되다시피 자랐다. 동리아이들 구슬과 딱지를 빼앗아와 마루 밑에 숨는 정도의 사고는 나도 치고 다녔다.

별난 아들들이 장성하여 어머니 은혜를 갚을 만 할 때, 그 당시 집안 대표선수이었든 공군 조종사(소령) 셋째형이 1967년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항공기 추락 사고로 순직해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남편에의 기대를 일찍 접고, 자식들에게 일생을 걸고 살든 어머니에게 아끼던 아들의 참혹한 사고사(事故死)는 일생 최대의 슬픔이었다. 평생 가슴에 맺힌 한과 슬픔을 더 이상 지탱 할 수 없었던지 그 사고가 있은 몇 해 후 어머니는 61세의 단명으로 타계했다.


내가 어머니와 이별한지 17개월밖에 되지 않을 때 워싱턴으로 부음이 전해졌다. 그 날부터 나의 그리운 고국은 텅 빈 고국이 되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고국은 반쪽이 되는 것인 줄은 부음을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후 나의 애창곡은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 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흥겨울 때라도 이 노래를 부를 땐 눈을 감고 이별하던 그 날, 우수(憂愁)에 젖은 어머니의 주름진 모습을 떠올린다.


 어머니가 예순이 되도록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나와 어머니는 ‘한 솥 밥’ 먹은 세월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초등학교 때부터 계산하면 줄잡아 2-3년뿐이다. 모자간의 인연치고는 너무 참혹하다. 그것이 나의 어머니에 대한 지울 수 없는 한(恨)이다. 어머니는 한없이 자애로웠지만 막내아들에게는 평생토록 껴안고 살아야하는 ‘뼈에 사무치는 고독’이란 천형(天刑)의 병(病)을 유산으로 남기고 떠났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부담을 덜어 주는 것,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빨리 출세하는 게 부모에 효도하는 길이란 생각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을 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출세는 평생해도 모자라는 게 출세인 것을. 효도는 내 생활의 여유가 있을 때만 하는 게 아닌 줄을 젊어서는 실감하지 못했다.


자식 된 자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터득했을 때는 나 자신도 이미 일모도원(日暮途遠)의 황혼 길에 서 있게 되는 줄 몰랐었다. 신문에 이름이 떠들썩하게 오르내리지 못하는 부모, 호의호식(好衣好食) 못시켜 주는 부모를 원망하며 살았든 것을 후회한다. 부모의 은혜를 배신한 죄, 사죄할 길이 없어 한스럽다. ◘


강호 2016-05-09 (월) 11:46
귀한 글..또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집사님의 한서린 고독과 그리움이 깃든 글의 깊이를 제가 얼마나 이해할까 싶어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그래도 글 하나하나가 제 마음에 진한 여운으로 다가옵니다. "출세는 평생해도 모자라는 게 출세인 것을. 효도는 내 생활의 여유가 있을 때만 하는 게 아닌 줄을 젊어서는 실감하지 못했다." 마음속 깊이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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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22182 2016-05-13 (금) 22:47
글을 올린 사람은 독자의 반응에 아주 민감한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글 한 줄 이라도 의미를 새기셨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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