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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생애와 신학 (스크랩)

글쓴이 : admin 날짜 : 2017-03-18 (토) 13:19 조회 : 474
1.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잉글랜드 북부의 링컨 주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인 엡웟(Epworth)에서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사제 사무엘 웨슬리와 경건한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사이의 19자녀 중에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19명의 형제자매가 태어났으나 그중에 9명의 형제자매는 어릴 때 사망하고 10명(형제3, 자매7)만 생존하였다.

여기서 잠깐 웨슬리의 어원을 알아보도록 하자. 1066년 영국 동남부에 있는 해스팅스에서 일명 센라크라고 하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들이 모두 생명을 잃게 되자, 과부가 된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은 서머싯 백작의 영지 안에 있는 웰스베(Welswe) 또는 웰스레(Welslegh)라는 농장으로 피신하였다. 이 지역은 영국 서남 해안에 있는 도싯셔에 속해 있었다. 1420년 이후부터 웰스베 또는 웰스레가 웰레슬레(Wellesleigh)로 변했으며, 그 후 웰레슬리(Wellesley)와 웰스리(Welsly)라고 불렸다가 1539년부터는 웨슬리(Wesley)로 불리게 되었다. 발음이 잘못되어 한때 웨스트리(Westley)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존 웨슬리는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세상적인 의미의 명문가가 아니라 신앙과 경건에서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가 명문가였다. 웨슬리가의 뿌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 따르면 친가 선조들은 중세기부터 대대손손 성직자가 많았고, 학자와 의사와 시문학가가 많았을 뿐 아니라, 음악 그리고 충성심과 특별히 중세기를 지나면서 존 웨슬리 가문에서는 유명한 기사(騎士, chivalry)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렇게 기사도 정신을 탁월하게 갖추고 국가와 교회와 사회를 지켜온 하나님의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다.

존 웨슬리의 외가도 영국 교회사에 빛나는 명문가다. 외할아버지 사무엘 아네슬리 박사(1620~1696)는 옥스퍼드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민법학 박사가 되었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어 런던에서 대표적인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선조의 신앙 전통을 따라 비국교도의 길을 택하였고 청교도의 대부라 불릴 정도로 청교도 운공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다.

이렇게 존 웨슬리의 선조들은 돈과 부에서 가난했으며, 세속적인 명예와 세속적인 권력에서도 가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과 고독과 박해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경건과 학문과 성직을 온전히 지켰으며, 후손에게 거룩한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실로 존 웨슬리는 우리 모두가 흠모할 만하며 교회사에서 빛나는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과 어머니 수산나는 청교도 전통의 기독교 신앙을 지닌 가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무엘이 성공회로 전향한 후, 교리의 문제로 사무엘과 수산나는 종종 가정에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어머니 수산나는 매우 강직한 신앙과 자녀에 대한 엄격하고도 교양 있는 교육으로 존과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수산나는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 세 가지 원리의 철저한 규칙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규칙의 철저한 준수이고, 둘째는 철저한 통제성, 셋째는 빈틈없는 기민성이다. 수산나에게 받은 어린시절의 교육은 이후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709년 2월 9일 목요일 밤 11시 엡웟 목사관의 화재는 존 웨슬리의 평생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소명의식을 지니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 이 화제에서 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화재의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불만을 품은 교구민들이 방화하였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엡웟에서의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엡웟 주민들은 존의 아버지 사무엘의 목회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왕궁에서 자신들의 토지를 개간하여 1/3은 왕이 차지하고, 1/3은 개간한 회사가 차지하고, 나머지 1/3을 주민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엡웟 주민들은 왕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그러므로 토리당(왕실)의 비호를 받는 사무엘 웨슬리가 엡웟에 들어오자 주민들은 사무엘과 수산나의 접근을 싫어하였고, 가능한 한 웨슬리 집안을 괴롭혔다. 주민들은 사무엘의 가정이 경작한 농작물을 불태우고, 젖소를 찔러 죽이거나 가축을 불구로 만드는 등 박해를 가하였다. 이 화재 사건을 통해, 웨슬리는 후에 자신의 생명은 “불 속에서 꺼낸 타다 남은 막대기”(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бренд вынул из горящего)로 부르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이후로 마을주민들은 화재 속에서도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무엘가족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웨슬리의 어릴 때의 삶은 정말 가난하고 어려운 삶이었다. 그런 중에도 사무엘과 수산나는 자녀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사무엘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웨슬리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전문학을 가르쳤고 애정 어린 친구이자 선생으로서 편지를 통해 그를 양육하였다. 특히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어 웨슬리에게 독서를 장려하였다. 존 웨슬리가 8~9세 사이에 천연두를 앓았다. 당시에 천연두는 모든 어린아이가 앓는 병이었으며 또 많은 아이들이 이 질병으로 죽었다. 존 웨슬리도 천연두에 걸려 아주 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남자답게 또 그리스도인의 용기로 잘 참아내었다. 이렇게 어머니인 수산나는 가난과 질병 속에서 싸워야 했지만 언제나 온순하고 엄격하였으며 어머니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다. 수산나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존 웨슬리의 모든 것은 어머니의 교육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어머니의 신앙 지도와 교육적 영향은 일생 동안 계속 되어 그의 삶의 목표와 방향, 그리고 모든 생활방식을 이끌어 갔다. 특별히 어머니 수산나는 엄격한 규칙을 만들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존 웨슬리는 어머니 수산나의 ‘규칙에 따라서 생활하는 훈련’(disciplined life according to the rules)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주일성수, 부모에게 순종하기, 잠자리에 드는 것, 일어나는 것, 식사, 기도, 독서, 공부, 노는 것, 일하는 것 등 하루의 모든 생활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하였으며, 모든 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어머니를 통하여 받은 규칙에 따르는 엄격한 생활 교육이 웨슬리의 인격 형성과 영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자신의 모친 수산나를 위대하게 보았다.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깨끗하며 정숙한 여인이었다. 웨슬리는 여성에 대해 깊은 존경심과 신뢰를 가졌는데, 이런 태도는 그의 모친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정신적 위기와 신학적 의문에 빠졌을 때 박식했던 수산나에게 직접 또는 서신을 통해 상담하는 것이 웨슬리에게는 기본적이 삶이었다. 이와 같이 존 웨슬리는 아버지로부터 영국 고교회 경건주의 신앙을 이어받았으며, 아버지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교구 목사의 아내로서 교구민들의 어머니 역할을 잘 해내면서 동시에 많은 자녀의 교육에 헌신적인 생애를 살았던 메도디즘의 어머니다. 그녀는 교회사에 빛나는 세 아들을 키워낸 인류역사에 위대한 어머니가 되었다.

2. 차터하우스 학교에서(1711~1720)
초등학교 교육의 어머니의 가정학습(home schooling)으로 마친 존 웨슬리는 1714년 1월 28일에 런던에 있는 명문 사립 기숙학교(boarding school)인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 School)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 학교는 1611년에 카투시안 수도회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설립된 이래 현재까지 영국에서 가장 우수한 명문 사립학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카투시안 수도회는 1084년 프랑스의 신비주의 성자 브르노(St. Bruno, 925~965)가 세운 엄격한 관상 수도회로서 세속에 대한 완전한 죽음과 포기를 추구하는 수도 규칙을 갖고 있었다. 이 수도회의 영성생활은 베네딕토 수도 생활과 은둔적인 금욕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존 웨슬리가 이 학교의 학생이 된 것은 특권이었지만 동시에 고생도 많이 하였다. 당시 영국의 기숙학교 생활은 여러 면에서 고생스러웠다. 엄격한 규율생활과 무거운 학과 공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교의 음식도 별로 좋은 수준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상급생들이 하급생들의 고기를 모두 빼앗아 먹었기 때문에 존 웨슬리는 10!14세까지 고기를 전혀 먹지 못했다. 오로지 빵만 먹었는데, 빵도 충분히 먹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 사무엘은 집을 더나 고생하는 아들에게 ‘젊어서 멍에를 메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큰 유익이다.’라고 말하면서 격려하였다. 존 웨슬리는 신앙과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모든 어려움을 잘 이겨내면서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로 성장해 갔다.

존 웨슬리는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어떠한 경건 훈련을 받았을까? 존 웨슬리의 차터하우스 학교생활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수도원 학교에서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주일에는 수도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경건의 훈련을 하였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웨슬리는 이 당시에 엡웟에서 지켰던 경건을 많이 상실하였으며, 경건생활에 게을러져서 죄의식에 빠졌다고 회상했다. 아마 존 웨슬리는 이 학교에서 경건생활에 게으르고 방탕한 다른 학생들을 보면서 일종의 영적인 혼란과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존 웨슬리는 혼자서 규칙적인 경건을 지키려고 단호한 결심을 하고 성경 읽기와 영국 국교회의 기도문을 가지고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하는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환경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지키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규칙을 세워 실천하였다. 첫째, 다른 아이들처럼 나쁘게 되기 않는다. 둘째, 무엇보다도 경건생활을 즐거워한다. 셋째,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여하고,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 차터하우스에서 존 웨슬리는 분명히 다른 학생들보다는 경건 훈련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엄격하고 따뜻한 지도를 받던 가정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그에게 차터하우스는 역시 하나의 도전이요 위기였다. 엡웟에서의 생활은 따뜻한 온실과도 같으며, 세상의 유혹과 시련이 닿을 수 없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차터하우스는 아주 다른 곳이었다. 차터하우스에서부터 존 웨슬리는 광야와 같이 험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존 웨슬리는 갓 나온 어린 성자와 같았다. 그는 여기서부터 세상이 주는 죄악의 유혹을 받으며 그 세력과 싸워야 했고, 대로 영적 전투에서 오는 시련과 고난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훈련되고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 웨슬리는 차터하우스에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축복도 많이 받았다.

3. 옥스퍼드에서의 경건 운동
18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 분야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합리주의는 기독교를 도덕 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18세기 말 영국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환 될 산업 혁명의 시작이 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산업 혁명의 영향 역시 기독교에 미치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가속화 시켰다. 그러나 18세기 초는 경건한 복음주의 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윌리엄 로오는 합리주의적인 기독교인 “이신론”에 반대하며, 존 웨슬리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웨슬리는 1720년에 옥스퍼드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클라이스트처치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724년에 인문학 학사를 받고, 1725년 9월 19일에는 영국 성공회 감독 포터에 의해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존 웨슬리는 1726년 3월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대학의 펠로우(Fellow, 연구교수)로 임명되고, 1728년에는 엘더 목사 안수를 받아서 영국 성공회의 사제로 임명된다.

이 시기에 장차 영국을 변화시킬 감리교 운동의 씨앗이 웨슬리의 삶에 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일기쓰기와 독서였다. 1725년 4월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존 웨슬리의 영적 일기는 그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초기 감리교 운동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메도디스트 운동은 존 웨슬리가 아니라 동생 찰스 웨슬리가 시작 하였다. 찰스 웨슬리는 매 주일 저녁에 두 친구(윌리엄 몰간과 로버트 커크함)와 함께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고 대화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1729년 11월 말경에 존 웨슬리가 옥스퍼드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고전 연구를 지도하고 동시에 그의 영적 생활의 증진을 돕는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존은 동생이 시작한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옥스퍼드의 신성클럽(Holy Club)이다. 이 모임은 학문연구와 경건의 훈련 즉 기도와 성서 읽기와 성만찬 받기를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옥스퍼드 메도디스트들의 모임인 신성클럽이 처음 생겨난 이야기이다. 

신성클럽은 존 웨슬리의 영적 학문적 지도력에 의하여 가장 건전하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경건 훈련 모임으로 발전하고 후에 위대한 메도디스트 운동을 낳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성클럽 회원들이 처음에 한 것은 매주 3~4회 저녁에 모여서 고전을 읽고 주일에는 신학을 읽으며 학문과 경건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다. 그들의 독서 목적은 학문의 발전과 경전의 증진을 위한 것이었는데, 점차로 그들의 관심은 규칙적으로 함께 모여서 독서와 대화와 기도를 함으로써 서로의 경건을 증진하는 일에 모아졌다. 신성클럽은 처음에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시작하여 경건의 훈련을 더하고 더불어 사랑의 실천을 필수적인 활동으로 삼는 모임으로 발전하였다. 옥스퍼드 신성클럽은 학문과 경건과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모였으며, 동시에 이러한 일은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그 다음 교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성화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기독교를 소유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추구하였다. 

당시 메드디스트라는 이름은 신성클럽의 회원들을 조롱하여 일컫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이 별명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였고, 신성클럽 회원은 모두 다 열성적인 신자들로서 어떤 경우에도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경건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옥스퍼드 대학의 모든 규정을 열성적으로 지키는 사람들로서 이러한 이름에 꼭 어울린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옥스퍼드의 사람들에 의해 불리워진 별명 “규칙쟁이”(Methodist)는 처음에는 조소하고 모욕하기 위해서 얻은 이름이 후일에는 거룩하고 명예로운 이름인 감리교회의 명칭이 된다. 메도디스트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로마 네로 황제 시대부터이다. 이때 특별한 방법의 의술을 사용하여 병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그 의사들은 자신들의 식이요법 의술이 만병통치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메도디스트는 본래 의학이나 의료 기술에 관련된 용어였다. 옥스퍼드 신성클럽은 인간의 병든 마음과 삶의 불행, 그리고 사회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민족의 고통을 치료하는 특별한 규칙과 방법을 발견하고 실천하였던 새로운 메드디스트들이었던 것이다. 옥스퍼드 메도디스트들은 인간의 죄악과 모든 불행을 치료하기 위하여 영적인 의술과 영적인 식이요법을 실천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존 웨슬리는 신성클럽 회원들은 무엇이든지 성경에 온전히 맞는 것이면 지켰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성경에 맞지 않으면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한 가지, 곧 ‘성경 그리스도인’(bible Christian)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성경 그리스도인’이란 성경을 초대교회가 해석한 대로 따르면서 성경을 모든 신앙과 삶의 전적이고 유일한 규칙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모임은 모든 신앙과 생활에서 성경을 최우선적 권위와 표준으로 삼으며, 성경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활에 완전히 일치하고,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규칙과 법을 순전하게 지켜 완전한 성결, 즉 마음과 생활의 성경(holiness of heart and life)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1735년에는 위대한 복음 설교가 조지 휘트필드가 “신성클럽”에 가입하였다. 조지 휘트필드는 이후 존 웨슬리와 결별하였지만, 미국의 영적 각성 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4. 조지아 선교 시대
존 웨슬리 형제는 1735년 10월 14일 영국 여객선 시몬즈호에 119명이 타고 그레이브센드 항구를 떠나 미국 조지아 선교를 떠나게 된다. 존 웨슬리가 선교사로 가게 된 동기가 무엇일까? 그가 미지의 땅 조지아를 향해 떠날 때 선상에서 쓰기 시작한 여행 일기와 편지에 조지아 선교의 동기가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지아는 옥스퍼드보다 자신의 성결을 이루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우리가 순수한 땅으로 자는 목적은 무슨 물질적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족한 복을 주셨다.) 배설물 같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요, 오로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기 위한 것뿐이다.] 셋째, 자신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여자가 없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야말로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환경이며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즉 조지아는 영국과 같은 문명세계와 달라서 자신이 죄를 짓도록 유혹할 만한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거기에서는 자신이 유혹 당할 만한 아름다운 여자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만큼 존 웨슬리는 죄악을 완전히 벗어버리고자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넷째, 인디언 부족들을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그곳은 타락 이전의 에덴과 같은 곳이라고 상상했다. 다섯째, 거기서 더 많은 선을 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존 웨슬리는 조지아에 선교사로 가는 동기와 그 목적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즉 인생의 목표인 완전한 성결을 이루기 위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설려고, 자기를 유혹할 만한 매혹적인 여자가 없는 세계를 찾아서, 많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더 많은 선생을 실천하려는 거룩한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시몬즈 여객선은 영국을 떠나 57일 동안 대서양을 항해하여 조지아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대서양 항해는 대단히 무섭고 험난한 항해였다. 그러나 존 웨슬리 형제 일행은 57일 동안 배 안에서도 옥스퍼드 메도디스트 규칙대로 생활하였다. 그들은 옥스퍼드 메도디즘의 세 가지 거룩한 일, 기도와 연구와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규칙을 세우고 시간표를 만들어 항해 시작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지키며 매일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멀고먼 미지의 신대륙을 향한 길고 험난한 57일간의 대서양 항해가 시작되었다. 니치만 감독을 포함하여 독일의 보헤미아 지방과 모라비아 지방에서 온 26명의 모라비아교인(*모리비아교의 기원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존 허스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보헤미야 종교개혁자 허스의 신앙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이 박해를 피하여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땅에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그들은 1457년에 허스가 가르치는 영적 교훈과 사도적 규범을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협회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모라비아 형제단’이다. 이후 그들은 카톨릭의 박해를 피하여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와 그밖의 지방으로 흩어져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1722년에는 진첸도르프를 만나게 되어 독일 헤른후트에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지도자가 된 진첸도르프는 이들의 신앙운동을 루터교회 개신교 신앙과 접목시켜서 하나의 개교회 경건주의 신앙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을 모범으로 삼아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철저한 경건생활을 실천하였다. 이들은 카톨릭교회의 경건주의인 수도원 영성생활과는 다르게 그것을 대신하는 독특한 개신교 경건주의를 형성하여 발전시켰다. 이후로 헤른후트는 개신교 경건주의의 본산지가 되었으며, 여기서부터 개신교 경건주의는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도는 1467년 독일에서 시작된 개신교 운동으로 성서의 권위, 개인구원, 십자가의 구속을 강조하는 신앙공동체이다.)들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메도디스트들의 눈길을 끌며 깊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 당시 대서양 항해는 항해 도중에 많은 여객선과 무역선이 폭풍과 태풍에 난파되고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생명을 내건 위험한 항해였다. 시몬즈 호는 크게 세 번의 폭풍우와 한 번의 태풍을 만났다. 항해 중 폭풍을 만났는데 이때 바닥에 넘어진 메도디스트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평화로운 찬송소리를 들었다. 바로 곁에서 독일 모라비아교인들이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비아교인들은 비에 젖고 바람에 넘어지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존 웨슬리는 그들을 계속 눈여겨보았다. 같은 시간에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교인들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예배를 막 끝낸 그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그 사람은 ‘네 두렵지 않습니다.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존 웨슬리가 다시 ‘당신들 중에 있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네, 우리들 중에는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들도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존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며 울고 있는 영국 교인들에게로 가서 ‘저기 모라비아교인들을 좀 보십시오.’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영국 교인들과 모라비아교인들의 분명한 차이점을 말해 주었다. 이때 모라비아교인들의 대답은 존 웨슬리에게 폭풍보다 더욱 강한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차이점은 첫 번째는 자신을 포함하여 메도디스트들은 기독교의 외면적 신앙(outward religion)은 소유했지만, 내면적 신앙(inward religion)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경건의 규칙과 습관이 있고 예배와 성찬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마음의 신앙(religion of heart)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감동과 감화를 받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속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속죄의 은총을 마음속에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체험적인 신앙이 없었다. 두 번째는 모라비아교인들은 기쁨으로 마음껏 찬송을 부르는데, 자신들은 부를 찬송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기도문과 예배순서는 있지만 마음의 찬송이 없었다. 자발적으로 마음껏 소리 내어 외쳐 부르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노래가 없다는 것이 커다란 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경건의 규칙과 의식을 중시하는 외면적 신앙만 가지고는 참다운 신자가 되기에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마음의 신앙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경험하였다. 통해 목격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침착한 태도와 경건은 존 웨슬리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의 선교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 아이들, 그리고 인디언들의 교육과 구제에 힘을 썼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를 임명하고, 즉흥적 설교와 즉흥적 기도를 예배에 도입하여 예배의 갱신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존 웨슬리는 열정과 헌신과 사명감은 충만했지만 너무나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에 맞추어 일하는 경험과 지혜가 부족했다. 

존 웨슬리가 선교사 생활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복은 모라비아교인들을 만난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존 웨슬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섭리요 은혜라고 생각된다. 조지아 선교는 실패라지만 모라비아교인들과의 만남은 위대한 존 웨슬리를 만들었고, 위대한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어떻든 유럽에서 이주한 현지인들과 인디언들과의 어려운 관계, 소피아 홉키 양과의 결혼 좌절 등으로 1737년 12월 2일 발에 먼지를 털고 조지아를 떠나게 된다.

존 웨슬리의 조지아 선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첫째, 존 웨슬리의 충성되고 창의적인 목회를 통해서 사반나의 영국인 교회가 부흥하였다.
둘째, 조지아 선교에서 존 웨슬리가 얻은 최대의 소득은 모라비아교인들을 만난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 마음의 신앙(religion of heart), 순회 설교 방식(circuit)과 속회(class meeting)와 애찬회, 그리고 즉흥설교와 즉흥기도와 마음의 찬송 부르기 등 모라비아교인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배우고 새롭게 도입한 것들은 존 웨슬리에게 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위하여 신선하고 든든한 기초를 놓았으며, 그 후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결실을 거두었다.
셋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에서 바쁜 생활 중에도 독서에 열중하였다. 특별히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를 깊이 연구하고 어거스트 프랑케 등 경건주의자와 신비주의 영성가들의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영성은 더욱 깊고 풍부해졌다.
넷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 경험을 통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게 되었다. 그가 이전에 가졌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그는 자연적 인간을 너무나 선하게 보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담의 타락 이전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죄악 된 인간성을 경험하고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라는 성경적인 인간 이해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수정은 그의 구원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다섯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또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 많고 약한 존재인가를 깊이 경험하였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떤 선한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여섯째, 존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 경험이 메도디즘 탄생의 두 번째 단계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하나님께서는 존 웨슬리를 조지아로 부르셔서 이 모든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모리비아교인들을 만나도록 인도하셨으며, 이로써 그가 올더스케이드로 나아가고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무서운 시련을 당하고 크나큰 실망을 안고 돌아온 존 웨슬리는 ‘인간의 방법이 다하고 이성이 실패하는 곳에서 그의 방법으로 나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믿으면서 쓰라린 상처를 달랬다. 조지아 선교가 처음의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음에 그가 갈 길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갖고 그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5. 회심 이후 감리교 운동
1738년 2월 1일 영국에 도착한 후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이 실패로 끝났다는 좌절감에 빠졌고, 또 소피아와의 연애 사건은 생각만 해도 배신감과 모욕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이 파멸에 이르렀다는 불안과 절망적인 생각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심정으로 힘없이 런던을 향했다. 런던에 도착한 그는 모라비아교인들의 지도자인 피터 뵐러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의 일기에서 ‘그와 친분을 쌓으며, 나는 나의 믿음이 없음을 깨달았다. 즉 나는 위대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존 웨슬리는 자신이 무엇을 갖지 못했는지 발견하였다. 피터 뵐러는 대화 속에서 존 웨슬리에게 계속해서 성경으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뵐러에게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뵐러는 먼저 ‘회개하고 그 믿음을 얻기를 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소위 순간적 회심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며, 자신이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하는 구원의 확신을 동반한다.

존 웨슬리는 이제 자신이 갖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채 그러한 신앙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뵐러에게 물었다. 이때 뵐러는 존 웨슬리에게 결코 설교를 중단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Preach faith till you have it.) 그리고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라고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계속해서 뵐러는 존 웨슬리에게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확신’(a sure trust and confidence)이라고 말하였을 때 존 웨슬리는 마음 깊이 감동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요약한 핵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뵐러와 다른 모라비아교인들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한순간에 주어지며 이로써 죄와 저주로부터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을 누리는 상태로 변화한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이러한 순간적 회심의 교리를 부인하고 수용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5월 24일 그날까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은사를 얻기를 사모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아직까지도 조지아의 어둡고 슬픈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이 방황하고 있던 존 웨슬리에게 5월 21일, 동생 찰스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고 죄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경험하는 회심을 체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두 형제가 회심을 체험하는 모습은 많이 다르다. 존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기 위해서 성경과 경험에 비추어보는 지적인 노력에 집중하는 반면에 찰스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감성적인 요소가 짙다.) 그런데 동생과 달리 존은 아직도 자기 죄를 슬퍼하는 영혼이었으며, 그의 마음을 한없이 무거웠다. 그는 자신의 선행과 의와 기도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만한 공로가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여, 자신이 받을 만한 것은 오직 저주와 형벌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에서 “믿어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믿는 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에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네틀톤 코드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신도회의 기도회에 갔다. 존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모라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날 저녁 8시 45분쯤에 아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케이트 신도회의 집회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설명을 듣는 중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는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뜨거운 영적 회심을(conversion) 하였다.

[그 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케잍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8시 45분,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위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존 웨슬리 “회심의 날 일기” 중에서)

존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 이전에도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신칭의 교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교리가 성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진실한 것인지를 자신이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였다. 존 웨슬리는 신앙에서 경험을 중시했다. 어떠한 신앙이라도 경험을 통해서 그 진실성과 정통성이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에 경험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속에 깊이 느끼는 마음의 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가르쳤다. 마음의 신앙은 “마음이 뜨거워짐”(warm-heartedness)으로 시작해서 자라난다. 신앙은 신비함이다. 머리와 이성만으로 다 이해되지 않는다. 이성으로 다 이해하고 증명하고 믿겠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음 뜨거움’(warm-heartedness)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특징이다. 그것은 메도디스트의 힘이요 매력이요 멋이다. 마음의 신앙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영원한 은사이고 전통이다. 마음의 뜨거움을 강조하는 마음의 신앙은 처음부터 메도디스트 신앙에 생동감과 역동성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주었다. 만약에 존 웨슬리가 마음의 신앙을 경험하지 못하고 마음의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18세기에 영국의 부흥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존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을 오로지 은혜를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더 발견하였다. 즉 올더스케이트에서 마음이 뜨거워진 체험으로 그의 모든 신앙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올더스케이트에서 체험한 것으로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얻은 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지, 성화의 문제까지 모두 해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올더스케이트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시는 대속의 은혜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assurance)하게 되는 칭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지 그의 마음과 성품과 생활까지도 완전히 성화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생애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 것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우심에 자신을 맡기면서 믿음과 순종의 행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즉 순간순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동시에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성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존 웨슬리의 올더스케이트의 회심의 의미는?
첫째, 회심 전에는 종의 믿음을 가졌으나 회심 후에는 아들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둘째, ‘거의 된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에서 ‘전적인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으로 변하였다.
셋째, 율법주의 신앙에서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온 것이다.
넷째,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 구원관(인간의 도덕적인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에서 복음주의 구원관으로 전환하였다.

다섯째, 개신교 정통 구원 교리인 ‘오직 믿음’(sola fide)과 ‘오직 은혜'(sola gratia),의 교리를 확고히 붙들었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고히 신뢰하였다.
여섯째,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바꾸었다.
일곱째,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열덟째, 마음의 신앙(religion of heart)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속죄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마음 뜨거움’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은사요 능력이다. 동시에 이러한 ‘마음의 신앙’은 성서적 신비주의요 건전한 신비주의이다.
아홉째, 올더스케이트 체험은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의 불씨요 원동력이다.
열째, 복음주의 신앙은 메도디스트 신앙의 뿌리요 핵심이요 본질이다.
열한째, 여전히 신앙의 목표는 성화-완전 성화다.
열두째, 올더스케이트 체험은 사실상 메도디즘 탄생의 세번째 단계다.

회심 후에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 독일로 2주간 여행을 하며 진젠도르프 백작을 직접 만나보고, 1738년 10월 런던으로 돌아왔다. 모라비안교인들에게 존 웨슬리는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웨슬리는 모라비안교인들의 경건이 너무도 주관적이며, 진젠도르프 자신이 지나치게 숭배된다고 생각하여 완전한 모라비안 교도가 되지는 않았다.

거룩한 체험을 한 웨슬리는 1739년 4월 1일 브리스톨에서 산상수훈강해로 야외 설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야외설교는 영국 전역에 놀라운 성령체험의 물결을 일으켰다. 초기 감리교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회(Society,소싸이어티)는 1739년 7월 11일 웨슬리와 휫필드에 의해 브리스톨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성공회 예배와 중복되지 않도록 모임 시간이 신중하게 결정되었고, 예배와 친고, 기도와 교육이 신도회에서 행해졌다.

1742년에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뿌리 내리고 성장하게 하는 “속회”(Class meeting)가 조직되었다. 약 12명 단위로 구성된 속회는 1명의 속장을 세워 매주 금요일에 모여서, 영적 생활을 점검하고 성경말씀을 공하며 기도와 교제를 나누는 소그룹 운동이었다. 속회에서는 2~3개월마다 시험을 치러 회원자격을 부여했으며 “충고와 견책”이 이루어지는 철저한 신앙훈련이 실시되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그의 “신약성서 주해”와 “표준 설교”를 깊이 강독하게 함으로 감리교 운동의 교리적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속회는 새 회당의 빚을 갚기 위해 결성되기 시작하였으나, 감리교회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속회는 1777년 런던 씨티로드에 봉헌된 “웨슬리예배당”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1944년 6월 파운더리에서 웨슬리 형제와 다른 네 명의 성직자, 그리고 네 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인 가운데 최초의 연회가 개최되었다. 연회에서는 믿음과 의인(義認, 의롭다고 인정하다), 확신과 성화에 관한 교리와 감리교 운동의 규율과 조직, 지도자의 역할 등이 주된 의제가 되었다. 1767년 런던연회, 1770년, 1777년, 1786년의 브리스톨 연회, 1787년의 맨체스터 연회로 이어져 나가면서, 감리교회는 크게 부흥하였고,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영국 전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여 감리교 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감리교회가 영국성공회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767년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감리교회가 창립된 후, 1776년 미국이 독립했을 때 15,000여 명의 감리교회 신자가 있었으며, 존 웨슬리는 이들의 성만찬과 세례를 위해 1784년 토마스 콕 박사를 미국 감리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존 웨슬리는 선교사업과 구제 사업을 위해 모든 사재를 다 쓰고,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일세”라는 고백 후에 시티 로드에서 88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온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존 웨슬리는 평생 5천마일(8046㎞)을 돌며 전도하고, 54,400여회의 설교를 하였으며, 135,000여명을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결신시키며, 500여명의 순회전도자를 길러내었다.


Ⅱ. 존 웨슬리의 신학(이론)
1. 웨슬리 신학의 네 가지 원천
첫째, 성경은 웨슬리 신학에서 기독교 교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이요 표준이 된다. 웨슬리는 “모든 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옷입기 위해” 1725년부터 자신을 “한 책의 사람”으로 선포한 이후, 1730년에는 “성경 외에는 어떠한 책에도 관심을 두지 안겠다”고 선언 하였다. 감리교회의 신앙 전통에 따르면,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게 된 사실을 증언한다. 웨슬리 신앙 전통 속에서 “성경은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원천이요, 믿음과 실행의 참된 법도와 안내이며, 모든 믿음에 대한 해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둘째, 웨슬리는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다음은 웨슬리가 미국으로 선교를 떠난 항해 중인 1735년 10월 21일(화) 일기의 한 부분이다.
새벽 4시에서 5시까지는 우리 각자의 개인기도 시간으로 했고, 5시에서 7시까지는 함께 성경을 읽었는데, 우리 자신의 이해에만 의존하지 않으려고, 초대 교회의 문헌들과 세심하게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웨슬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유산으로 내려오는 전통, 특별히 초대 교부들과 영국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러한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셋째, 웨슬리는 성경적 진리의 증거를 일상적 삶의 체험과 결된 상식적인 지식(이성)에서도 찾았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성의 빛 아래 진리를 추구하였으며, 이성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믿게 하는 힘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였다. 
웨슬리가 말하는 이성이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영혼이 지닌 능력으로 사물을 이해하며, 사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이것을 언어(생각의 언어를 포함)로 표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넷째, 웨슬리는 체험적 신앙(경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신뢰이며 성령의 내적 증거와 외적 열매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올더스케으트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 곧 종교적 경험을 한 웨슬리는 경험이란 성경적 진리를 확증할 수 있는 시험장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계시되어 있는 권위의 원천이 된다. 전통은 성경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건전성을 조명하여 주다. 신앙경험은 성경의 진리를 확증하며 신앙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그리고 이성은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며 판단하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웨슬리는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 신학적 원천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한다.

2. 웨슬리의 구원론
첫째. 선제적 은총(혹은 선행 은총)이란 구원의 과정 중 칭의(稱義)의 앞선 단계로서, 하나님의 행위가 항상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제적 은총의 사상은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웨슬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을 위한 거룩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하지 않으신다면, 당신 자신을 위한 구원의 사역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언을 이룸”에 관한 웨슬리의 설교문) 웨슬리의 설교는 구원 사역에 하나님의 앞선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주고 있다.

둘째, “회개”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 된 자신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참회의 심정을 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존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원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의인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겸허하고 참회해야 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는(즉 자기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를 지녀야 하는) 것이 옳고 당연하다. 따라서 이 참회와 통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존 웨슬리의 “감리교인의 원리” 중에서)

웨슬리는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한다. 이러한 웨슬리의 인간이해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창세기 6:5의 말씀에서 기초한 것이다.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이해하였던 웨슬리는 그러한 인간 본성 안에 “선을 향한 거룩한 충동”이 있음도 확신하였다. 웨슬리는 “회개”의 원인이 되는 “선을 향한 인간의 거룩한 충동”을 선재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살아있으신 현존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장로교인들이 보지 못했던 웨슬리의 독특한 통찰이요 이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셋째, 칭의(稱義, 의롭다 일컬음)에 관하여 웨슬리의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칭의라 함은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귀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존 웨슬리의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 설교 중에서)

그리고 이러한 칭의 과정에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결국 “칭의”의 중심에서 빛나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인 것이다. 웨슬리는 “신앙으로 얻는 칭의”(1746년)라는 그의 설교에서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 사역을 로마서 4장 5절 말씀을 근거로 설명한다. “일을 아니 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결국 칭의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 십자가의 공로로, 그러한 사실을 믿는 우리 모두가 용서함 받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 사건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신생”이란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생”, 곧 “거듭남”이란 성화의 첫 단계이며, 성화와 함께 발생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끄실 때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웨슬리가 1760년에 설교한 “신생, 곧 거듭남”의 설교문의 한 부분인데, 웨슬리는 요한복음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 “신생”의 근거 구절로 삼았다.

신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영혼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시생은 의와 참된 성결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교만이 겸비로, 거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미움 시기 악의가 모든 인류에 대한 신실과 온유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존 웨슬리의 “신생” 설교 중에서)

칭의(稱義, 의롭다 일컬음)에서 사역의 중심에는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위치한다. 반면 “신생”의 과정에서 빛나는 불꽃은 단연 “성령의 역사”이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이것을 보다 분명히 보여 준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요 3:4-5)

다섯째, “성화”란 웨슬리에 따르면, “우리가 죄의 권세와 뿌리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화에 대한 이해는 1739년 9월 12일 일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성화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성화란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벧후 1:4)이며, 그리스도께서 안에 있는 마음(빌 2:5)이며,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마음에 갱신하는 것(골 3:10)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국 성화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이며 “하늘 아버지가 거룩하듯이 우리도 거룩해 지는 것”으로,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변화와 은혜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섯째, “완전”은 웨슬리 신학 사상의 꽃이다. 웨슬리 신학 사상의 꽃인 “완전”을 한마디로 다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음은 완전에 대한 웨슬리 자신의 답변이다.

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답: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성품과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다. 영혼 속에 잔재하지 아니하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중에서)

존 웨슬리의 완전에 대한 이해는 그가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1752년 출판한 찬송시의 내용을 요약한 다음의 글에서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1)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과 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서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는 것, (2)이것은 신앙으로만 받는다는 것, (3) 그것은 순간적으로, 한 순간에 주어진다는 것, (4)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는 시간은 임종 시가 아니라 매 순간이며, 지금이 허락된 시간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중에서)


Ⅲ. 존 웨슬리의 신학(실천)
1. 웨슬리와 전도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단 없는 사명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9-20).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88세를 살며, 5천마일(지구전체 길이의 4분의 1)을 50년 넘도록 전도를 위해 다녔고, 135,000명을 전도하여 결신시켰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을 충성스럽게 실천한 주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웨슬리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전도하게 하고, 전도의 결실을 낳게 한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로, 웨슬리는 “성령의 확신”을 믿었다. 성령께서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 예수님의 사랑하심, 죄사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됨을 증거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함께 하심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평생 전도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웨슬리는 전도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는 조직이 전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미국 선교지에서 안수 받은 목사의 요청에0 따라, 콕 목사를 미국 선교지로 파송하고, 애즈베리를 안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국 성공회에서는 반대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전도를 위해 조직 운영에 있어 개방적이며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 교육을 항상 병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 밖으로 나가는 선교”와 함께 “교회 안에서의 신앙교육”을 함께 강조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전도와 신앙교육을 통해 교회의 질적이며 양적인 부흥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웨슬리가 강조한 감리회의 전도 운동은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여, 불신자를 성경의 사람으로 교육하여, 그들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사회개혁의 의지라 할 수 있다.

넷째로,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속회 운동”의 결정판이다. 감리회의 신앙 운동에서 속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속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신도의 역할이다. 웨슬리는 말씀의 교육과 실천을 위해 속회를 조직하였다. 책임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전도를 통해 속회를 부흥시켰고, 속회의 부흥은 새로운 속회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감리회가 건강하게 부흥하기 위해, 속회의 부흥은 필수적인 것이다.

다섯째, 웨슬리는 전도에 있어 매우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자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감옥에 있는 자 등, 모든 소외계층”을 포괄하였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당시 영국 사회에 매우 큰 파장이 되었다. 사회가 돌보지 않는 이들을 웨슬리는 주님의 품에서 양육하였던 것이다.

전도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이다. 전도는 교회의 부흥은 물론,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사회개혁운동이다. 웨슬리의 전도운동이 당시 영국을 변화시킨 역사적 유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웨슬리의 전도 운동은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 부흥과 사회 혁신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2. 웨슬리의 재물관
존 웨슬리는 그의 평생 설교와 저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연간 수입이 1,400파운드를 넘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을 위한 사용에는 연간 28파운드만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나의 모든 돈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신자들은 소득의 100퍼센트를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돈에 대한 웨슬리의 실제적인 지침은 첫째, “벌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벌어라”이다. 둘째,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저축하라”이다. 셋째, “줄 수 있다면 , 최선을 다해 나누어줘라”이다. 웨슬리는 헌금 생활은 십일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의 마음을 황금에 두고 있다”고 말하였다. 크리스천의 헌금은 십일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의 구조가 더 중요하다.

웨슬리는 재물 사용에 대한 네 가지 성서적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는 “당신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딤전 5:8)고 하였다.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은 가난한 교회의 목사였다. 어린 시절에 웨슬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둘째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딤전 6:8)고 했다.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족함은 감사의 생활로부터 비롯된다. 감사할 때, 돈이 주는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 셋째는 “정직하게 거래하고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넷째는 “잉여 자금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라”고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첫째, 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이 이 돈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돈을 맡은 청지기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둘째, 하나님께서는 의의 부활 때에 내가 쓰는 이 돈으로 인해 나에게 상을 주실 것인가?

1791년에 그가 임종할 때, 그의 유서에 언급되어 있는 돈은 그의 주머니와 옷장 서랍에 남겨져 있는 동전들 뿐 이었다. 웨슬리는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돈으로 자신만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살았다. 웨슬리는 돈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지배하며 살 수 있는 신앙의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다. 돈의 소유는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돈을 관리하는 주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이 돈으로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3. 웨슬리와 성령체험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올더스케이트 작은 집회에서의 존 웨슬리의 성령 체험은 감리회 역사의 최고봉에 위치한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은 그가 속해 있던 성공회와 감리회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신학적 기준이 된다. 20세기 웨슬리 연구의 대가인 알버트 아우틀러 박사는 성공회에서 강조하는 “성서”, “전통”, “이성”의 삼중구조에 성령체험을 “경험” 차원에서 정립한 것이 바로 웨슬리의 공헌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가 감리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성령체험을 성서, 전통, 이성과의 지속적인 조명을 통해, 감리회의 예배 속에 정착하였다. 웨슬리는 성공회와 장로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야외설교, 즉흥기도, 순회설교, 속회, 그리고 찬양의 열정을 예배의 순서 속에 도입하여 예배에 참된 활력을 불어 넣었다. 오늘날 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찬양사역과 열린 예배의 기원을 우리는 웨슬리의 “성령체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웨슬리에게서 “성령 체험”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결정적인 내적 증거가 된다. 웨슬리는 "성령체험“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증거라고 설교 하였다. ”성령체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증대시킨다. 웨슬리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간과되어왔던 성령에 대한 이해를 교회의 살아 움직이는 제도 속에 정립한 목사이며 신학자이다. 웨슬리는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영적 생명을 나눠주며,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의와 평강과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설교하였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은 교리에 갇혀 있는 “성령론”이 아니다. 목회를 통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웨슬리의 신학과 실천 속에 살아 숨쉬는 “성령체험”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성령체험”이 여기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리 잡게 될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교회마다 넘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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