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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2) - 달과 손가락

글쓴이 : admin 날짜 : 2017-09-25 (월) 04:32 조회 : 203

요한복음 강해 (2)


달과 손가락 Moon & Finger”


요한 John 1:19-29 / 2017924

 


   1.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유명한 말을 아시지요? 세례요한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습니다. (화면21)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과도한 관심을 갖자, 내가 아니라 내가 가리키는 달을 바라보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은 그저 그분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람일뿐이라고, 그러니 제발 내 손가락을 보지말고, 내가 가리키는 저 달을 보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강해설교 두번째 시간으로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대로 세례 요한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그의 손가락만 바라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가리키는 분, 즉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볼 수 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먼저 다루고나서 그가 가리킨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유대교의 한 종파였던에세네파’(Essenes)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화면22) 에세네파 사람들은 혼잡한 도시를 떠나 광야의 동굴에 은둔했습니다. 거기서 집단 생활을 했지만 극도로 절제된 금욕과 고행을 실천하며, 성경을 필사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던 신비로운 종파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던 모습은 다분히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임을 추측케 해줍니다.

   세례요한이라는 이름은 굉장히 이상한 이름입니다. (화면23) ‘John’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대 사회에서 낯선 이름이었고, ‘세례라는 말은 이름에 붙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계시를 받은 두 부부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John’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후 유대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유명해지자 이 이름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세례라는 말은 당시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일로 유명했기 때문에 별명처럼 ‘John the Baptist’라고 붙여 부른 것입니다.

   (화면24) 사실 세례요한은 사두개파에 속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에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버리고 에세네파의 일원이 되었는데, 어느날 사명감을 느끼고 세상으로 다시 내려와서 회개와 세례 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메시지를 오늘의 언어로 요약하면, (화면25)종교의 허울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그 회개에 걸맞는 열매를 맺으며 살라.’ 

   세례요한은 당시 주류 제도권 유대교를 강렬히 비판했습니다. 형식주의, 교리주의,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교 사제 그룹과 신앙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화면26) 이같은 요한의 메시지는 참된 신앙을 갈망하며 숨어있던 유대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이스라엘 전역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킵니다. 전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몰려 들었고, 일반 백성들은 물론 깨어있는 지도자들까지도 그를 남몰래 존경했습니다


   3.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메시아요? 다시 살아난 엘리야요? 아니면 예언자요?” 이 이름들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는 이름들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믿었으며, 끊어진 예언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고대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분명히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대로 나는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오!” 

   “I am the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화면27)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버려진 땅 사막으로부터 울려오는 하나의 작은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어떤 것입니까?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고 형체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무언가를 말하고 사라져버리는 어떤 것입니다. 자기는 그저 무언가를 알려주고 사라져 버리는 하나의 소리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면서 대체 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오?” 그러자 자기가 세례를 베푸는 이유가 무언지 설명하지 않고, 자기  뒤에 오실 분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한 분이 서 계시는데,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소!” 사람들이 손가락에 대해 묻자, 손가락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이 주목 받는 것을 철저히 피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저 광야에 울리는 하나의 소리라고 대답한 것이나, 내가 베푸는 세례에 관심 갖지 말고 내 뒤에 오시는 분, 내가 감히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는 그 분을 보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보통 집에 돌아온 주인을 위해 그 집 종이 달려와서 하는 일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분에 비하면 자신은 신발 끈을 푸는 종의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온 이스라엘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 했던 인물,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존경했던 인물, 그래서 종교 지도자나 권력자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고귀한 인물, 우리는 그의 놀라운 겸손과 인품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가리키는 달을 보기 전에 그의 손가락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후일 그를 두고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고두고 본받을만한 참으로 귀한 신앙인의 모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례요한이란 손가락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서 그가 가리키는 달을 볼 차례입니다. 대체 그 분이 누구이기에 자신은 그저 한번 울리고 사라져 버릴 소리에 불과하다고 했는지, 신발 끈조차 풀 수 없는 존재라고 비유했는지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살펴 보는 것은 오늘 말씀의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세례요한이 그분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절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화면28) 어린 양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속죄 제사 때 드리는 제물입니다. 양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전가시킨 후에 그것을 죽임으로 죄를 씻는 것이 속죄 제사의 핵심입니다. 어린 양은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 하는 속죄 제물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이것이 세례요한이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었습니다. (화면29) 나의 죄, 너의 죄, 우리 모두의 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세례요한이 소개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분이라는  설명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저지른 범법 행위, 나 자신의 개인적인 죄를 무조건 대신 짊어진다는 뜻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단지 개인적인 일탈이나 범법 행위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인간 사회를 전부 포함해서 인간이 겪는 온간 종류의 불의와 부조리, 인생의 모든 고난과 불행,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전부 포함하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생을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종류의 비정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지 내 개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분이 아니라, 내 삶의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시는 분, 우리 인생 여정의 나침반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5.

   지난 2천년 역사가 흐르는 동안 기독교에 자리잡은 가장 대표적인 교리가 대속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대속의 교리만큼 잘못 해석되고 오해를 받은 교리가 없습니다. (화면30) 우리가 보통 아는 대속의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어린 양처럼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교리아닙니까? 이 교리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면31)  

   도저히 믿을 수 없단 사람들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2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죽은 한 사람의 죽음이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현대인들이 믿고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편 믿음으로 이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즉시 내 죄가 말소  되고, 대속의 사건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고민이 크실텐데, 다행히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속의 교리는 터무니 없고 믿을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교리가 아니며, 또한 대속의 교리는 예수 믿으면 자동으로 우리 죄가 말소되는 기계적인 공식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속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화면32) 대속의 교리는 예수님이 시작하셨지만 우리가 완성해야 하는 교리입니다. 예수 믿으면 즉시 우리 죄가 자동으로 씻겨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속의 삶(어린 양의 삶)을 우리도 본받아 살아감으로 대속의 교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속의 삶(어린 양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화면33) 그것은 한마디로 내 탓이오의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대신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인류를 향해 그것은 당신들 탓이 아닌 내 탓이오라고 외친 것과 같습니다. 이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대속의 교리가 완성됩니다. 만일 우리가 대속의 삶을 본받아 살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셨으니 내 죄가 사해졌다고 기계적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이 내 탓이오라고 할 때, ‘그래 맞어, 네 탓이야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탓이오라고 할때 우리가 할 일은 그래요, 예수님 탓이 맞아요라고 할게 아니라,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탓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가 대속의 교리를 바로 믿는 것이고 대속의 교리를 완성하는 자세입니다. (화면34)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 탓이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일상에서 매일 일어나는 다툼과 갈등, 미움과 오해의 한 복판에서 예수님처럼 내 탓입니다할 줄 안다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때 대속의 교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땅의 나눔과 갈라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대속의 삶을 실천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이라는 아름다운 손가락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 어린 양 예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례요한이라는 너무나 겸손한 신앙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죄된 우리들을 향해 내 탓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자리로 가신 우리들의 귀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시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 내 탓입니다하고 겸손히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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