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le_worship_02.gif
총 게시물 173건, 최근 0 건

요한복음 강해 (4) - 나다나엘

글쓴이 : admin 날짜 : 2017-10-16 (월) 06:10 조회 : 44

요한복음 강해 (4)

나다나엘 Nathanael”

요한 John 1:43-51 / 20171015

 


   ‘나다나엘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강해 네번째 시간입니다. 첫 시간에는 사람의 어두운 내면을 환희  비추는 빛과 같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고, 두번째 시간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할 수 있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그리고 지난주 세번째 시간에는 예수님의 질문과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가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두 개의 질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에 담긴 메시지를 살펴봄으로, 요한복음 1장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에 이어서 오늘의 주인공은 빌립과 나다나엘인데, 특이한 점은 유명한 빌립이 아닌 나다나엘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점입니다. 빌립은 널리 잘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디오피아의 고위 관료를 회심시키고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했던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12제자에 속하지도 않고, 성경 다른 곳에서도 거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습니다

   9세기 무렵이 되어서 교회는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바돌로매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교회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성서학계는 그가 바돌로매가 아니라, ‘경건한 사람을 뜻하는 싱징적 인물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상징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고,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외에 등장하는 곳이 없습니다.    

   어째든 우리는 복음서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요한복음 본문이 나다나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다나엘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개인에게 부여하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영적 본성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처럼 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처럼 살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이름 그대로 나다나엘로 살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살펴보면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이례적인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가 받은 칭찬의 내용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사는 비결일 것입니다.   


   그는 왜 칭찬을 받았나?

   본문 말씀을 보면, 먼저 빌립이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내가 율법 책에 기록되고 예언자들이 말한 그 분을 만났소.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인 예수라는 분이오.” 그러자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사렛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옛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부정한 지역으로 여겼고유대인들은 속담처럼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이 지점까지 나다나엘은 칭찬받을 만한 면모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쩌면 습관적인 신앙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 경건하고 경건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자세가 그렇습니다. 신앙이 습관이 되고 형식이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누고, 경건한 것과 경건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현상,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르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나다나엘의 첫 모습은 습관적 신앙 일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는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님과 첫 만남을 가진 순간부터 나다나엘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언제나 주님과의 참 만남은 이렇듯 우리들의 참 모습과 진면목이 드러나게 해줍니다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구나. 너에겐  거짓이 없구나.” 나다나엘이 깜짝놀랍니다. “처음 뵙는 분인데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생각해 봅시다. 우선 예수님에 대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잘 아십니다. 내 이름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처럼 그분을 제대로 만날때면 깜짝 놀라곤 합니다. 겉 사람이 아닌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당시 유대 사회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동일한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동일한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상위 1%의 부자들과 소수의 권력자들이 세상을 지배했고, 종교와 신앙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고민없이 그 시대의 가치관을  따라 그 속에서 적응하며 생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서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라며 기도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언젠가 때가 차서 메시아가 도래할 때 제일먼저 무화과나무 아래로 오셔서 거기서 기도하는 이들을 만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따라서 불의한 세상과 타락한 종교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참되고 거룩한 세상을 꿈꾸는 깨어있는 이들은 수시로 무화과나무 아래로 나아가 기도하곤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바로 그런 소수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다나엘을 칭찬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따라 고민없이 잘 적응하며 사는 사람을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며 고민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질서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나다나엘이고, 그런 사람을 향해 주님은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네 속에 거짓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이 보게 될 더 큰 일이란?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다나엘을 칭찬하셨고, 나다나엘은 그런 자신을 알아보는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메시아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씀대로 정말 무화과나무 아래로 메시아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한 가지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너를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메시아를 만난 것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겁니다. 메시아를 만난 것보다 더 큰 일이란 뭘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은 야곱이 베델에서 돌베게를 베고 자다가 목격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적 의미는 여기 척박한 땅과 저기 거룩한 하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둘이 아니며, ‘평범한 시간과 평범한 장소인 지금 여기가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메세지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셔서 이 땅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것을 열어 보여주신 분입니다. 척박한 이 땅,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 나라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야곱의 사다리 같은 분이라는 것이고,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예수님이 야곱의 사다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실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저 하늘에서 거룩한 보좌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사다리를 타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신   분입니다. 거룩하고 흠없는 천국에 고고하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죄 많고 흠결 가득한 세상에 기꺼이 뛰어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땅을 거부하고 저 천국만을 사모하는 신앙이 아니라,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가는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의 저기를 지향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지향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크고 놀라운 일이지만, 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는 것도 큰 일이지만, 예수님이 고난 받는 메시아란 사실을 믿는 것은 더 큰 일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세상 모든 죄악을 심판하겠다는 약속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를 무력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더 큰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나오는 말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경험하는 삶, 여러분은 괜찮으십니까? 나와 우리 가족만 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잘 생존하면 그만일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까? 전쟁, 테러, 살인, 폭력, 마약, , 중독, 고독,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세상에 넘쳐납니다. 오만한 권력자들과 통치자들이 우리 삶을 얼마나 위협하고 있습니까? 타락한 종교는 우리 신앙을 또 얼마나 변질시키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다나엘처럼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며 무화과나무 아래로 나아가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보다 더 큰 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대처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단번에  뒤엎으셔서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고 아파하시다 끝내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무얼해야 합니까? 할수 있는대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하나님의 전능한 힘으로 단번에 해결되길 바랄 것이 아니라, 끝없이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끝내는 내가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요, 오늘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주시려는 말씀입니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 (체크하면 글쓴이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쪽의 글자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