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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7) - 다시 나지 않으면

글쓴이 : admin 날짜 : 2017-12-12 (화) 04:44 조회 : 136

강림절 둘째주 / 요한복음 강해 (7)

다시나지 않으면 Unless you are born again”

요한 John 3:1-8 / 20171210

 


   우리들의 방황


    저는 신학교 2학년 무렵까지 부모님께 온순한 아들, 목사님과 어른께 칭찬듣는 자타 공인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3학년무렵부터 이런 삶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제 삶을 흔든 것은 세 가지였는데, 신학교에서 배운 새 지식, 수천명을 죽인 독재자가 대한민국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 한국 교회가 정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존의 세계관이 전부 흔들리면서 나를 지탱해 주던 삶의 기반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는 과정에 대해 회의를 느끼면서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일단 집을 나와서 친구랑 자취를 시작했고, Pub이나 뮤직 카페에서 기타치며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학교 수업에 거의 안들어가고, 학교 서클에서 이념 서적을 읽고 토론하고 데모하는 데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술 담배도 많이 하고, 데모하다 잡혀서 구치소에 갇히도 하고, 가벼운 연애도 자주 하고, 닥치는대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방황했던 시절입니다.

   방황 끝에 학교를 휴학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습니다. 군대 다녀오면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죠. 현역 입영 대상자로 영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신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즉시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그때로부터 2년간 투병생활을 하게 됩니다. 병실에 갇혀서 군대생활을 한 셈인데,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희망이 없구나 싶은 깊은 좌절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많이 방황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몸이 회복되고 난 후에 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회를 다시 꿈꿉니다. 서툴기 짝이 없던 첫 목회 시절, 갈등과 번민의 부목사 시절, 너무 가난했던 캐나다 이민 시절, 와싱톤 한인교회서의 부목사 시절, 그리고 애쉬번 한인교회에서의 지난 5년여의 시절, 돌아보면 언제나 삶의 어려움이 있었고, 새로운 종류의 방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엔 젊은 시절대로, 목회 초반기는 초반기 대로, 또 목회 중반기는 중반기대로, 어려움과 고민, 또 새로운 종류의 방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용은 달라도 여러분의 삶에도 수 많은 고난과 방황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 흔들림 없이 평탄하고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겉으로 무난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한 사람의 내면을 들춰 보면 갈등과 번민, 아픔과 상처가 있고 방황의 흔적들이 가득합니다. 우린  누구나 흔들리고 방황하며 삽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이상할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황하는 삶에 대해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니고데모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니고데모의 방황


   니고데모는 방황하는 신앙인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하면 복음서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율법의 형식에 매인 사람들, 예수님과 대립한 사람들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유대 신앙이 헬라제국의 핍박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을 때, 최선봉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사람들입니다. 또 이후에 유대교 안에서 율법을 체계적으로 정돈하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참신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개혁 세력이었습니다.

   이후 100여년이 흘러 예수님 당시에는 다양한 계층의 바리새파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는  율법과 종교 형식에 빠진 그룹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부도 많이 하고, 영적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들로써, 유대 신앙이 부패하지 않도록 유대교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유대 백성들로부터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또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당시 유대사회에는 산헤드린’(Sanhedrin)이라는 기관이 있었는데, 로마로부터 재가를 받은 유대인들의 입법 사법 기구였습니다. 종교 법을 제정하기도 하고, 중요한 재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의 국회와 같은 기관이었고, 니고데모는 유대의 국회의원과 같은 지도급 멤버였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의 의원, 많은 유대인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 공부도 많이 하고 신앙 훈련도 많이 받은 엘리트,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서 법을 제정하는 사람, 어떤 면에서나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 지금 남몰래 남의 시선을 피해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것입니다. 그에게도 남 모르는 갈등과 방황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흔들림 없는 삶을 살 것 같은 사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렇게 한 밤중에 몰래 찾아와 예수님 앞에서 선생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선생님처럼 그런 표징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과 방황의 그림자로 가득찬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다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말 뜻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다시 나야 할 필요성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다시 나야 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나 자신에 대해 못마땅 함을 느끼면서도 다시 나야겠다는 생각은 잘 안하지 않습니까? 내 밖에 있는 상황이 바뀌기를, 내가 아닌 상대편이  바뀌기를 기대할 때는 많아도 내가 다시 나야겠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엘리트중의 엘리트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국회의원이자 판사이면서, 성직자이자 신학교수 같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법을 제정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며, 종교적 규율을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한번도 자기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 본적이 없습니다. 내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엘리트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바보에 가깝습니다. 자기 자신이 다시 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문제 의식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영적 바보였습니다

   저는 니고데모에게서 저의 모습,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나름 열심히 잘 살아갑니다. 어떤 분야에서는 인정도 받고, 자랑스러운 삶을 살기도 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성실히 섬기기도 하고 신앙생활도 꾸준히 해 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은 잘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다시 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거듭남에 대한 오해 


   ‘다시 나는 것’, 혹은 거듭남에 대한 두 가지 큰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거듭남을 어떤 영적 체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강렬한 영적체험을 거듭남의 체험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은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은 거듭남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강렬한 영적 체험은 경험한 사람들에겐 때로 영적 교만을 불러오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거북함을 일으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영적 체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뿐이지 그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는 아닙니다

   둘째는 거듭남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본래적인 성품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살면서 잘못 만들어진 성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나야 한다는 것은 잘못 형성된 성품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아는 사실,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경험이지요. 그러나 이 생각은, ‘고칠 수 있고 또 고쳐야만 하는 우리의 왜곡된 성품까지 그대로 내버려 두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딱딱하게 굳어진 성품이라 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성품은 반드시 고쳐야 하고 또 고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이고,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의 근본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반드시 다시 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거듭남으로 가는 길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내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이 필요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세째는 우리 스스로가 날마다 변화를 도모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반드시 함께 맞물려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듭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선, 다시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이나 깨달음이 없다면, 그럴 필요성을 못느낀다면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니고데모야 말로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완벽에 가까운 성품과 신앙, 식견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식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일먼저 그를 보자마자 거듭나야겠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시 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다시 나지 않으면이라고 하신 부분의 성경 주해를 보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근본적으로 하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그토록 새로워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내 의지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째로 동시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변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 불가능 하다는 대 전제 아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신화같은 믿음을 내려놓고, 오늘 우리 몫의 변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거듭남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작은 변화부터 도모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변화도 거듭남이라고 말할 수 있고, 완전한 거듭남은 그런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자꾸 큰 변화를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배우자를 대하는 작은 태도부터 한번 바꿔보는 것입니다. 불친절한 말투를 바꿔보고, 무뚝뚝한 표정에 미소를 지어보고, 화가 나도 한번 더 참아보는 겁니다. 자녀들에게 의도적으로 부드럽게 말하고, 직장 동료들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보는 겁니다. 교회 형제 자매들을 정말 가족처럼 여겨주고, 섭섭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으려 애써 보는 겁니다열가지 시도 중에 한가지만 성공해도, 그 작은 변화로 인해 우리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변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변화할 수 있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한번도 제대로 묵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진지하게 제대로 기도해 본적이 없으십니까? 왜 지레 못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단 한 귀절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30초의 기도를 드리는 것부터 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시도와 변화가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작은 변화의 시도들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제가 종종 소개했던 이야기를 오늘 다시 소개합니다.   

   중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히말라야산을 맨발로 넘은 한 티벳 노인이 있었습니다. 등산 장비를 갖추고도 넘기 어려운 산을 겨우 맨발로 넘어 왔다고해서 커다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을 할만한 남다른 비법이 있을까 궁금해하는 서방의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맨발로 그 길고 험한 히말라야를 넘을 수 있었습니까?’ 그 노인은 짧게 한마디만 대답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씩 걸었을 뿐입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 그 작은 믿음이 이 산더러 저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대로 되는 기적  일으킵니다. 맨발로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세계에서 가장 험한 산 히말라야를 넘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스스로 다시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다시 날 수 있도록 은총을 부어 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동시에 오늘 하루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겨자씨만한 변화를 실천하고, 내가 내디딜 수 있는 작은 한걸음의 변화를 내디딜 수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거듭나는 기적, 변화되는 기적, 새로워지는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참된 변화를 위해 이런 작은 실천을 결심하는 여러분 위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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