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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2) - 하나님은 영이시다

글쓴이 : admin 날짜 : 2018-02-20 (화) 12:17 조회 : 169

사순절 첫번째주 / 요한복음 강해 (12)

하나님은 영이시다 God Is Spirit”

요한 John 4:16-26 / 2018218

 


   1.

   2년전쯤 어떤 낯선 분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셨는데, 예배가 끝나고 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왜 이 교회는 사도신경을 하지 않죠? 감리교회라서 그런가요? 어떻게 예배에 사도신경이 없지요?’ 이분은 예배 순서에는 이런 것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예배 형식은 이래야 한다는 어떤 확신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확신은 어디서 온걸까요?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이 없으면 안된다고 누군가에게 배우셨겠지요

   사도신경은 주후 300년경에 그 초안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이후 끝없는 반박과 신학 논쟁을 벌이다가 주후 1000년에서야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두고 여전히 신학적 찬반이 많습니다. 찬성하는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잘 요약했다고 주장하지만, 반대하는 이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반대합니다. 사도들이 만든게 아니라는 점, 빌라도에게 고난받았다는 표현, 거룩한 공회란 말등을 지적하면서, 공동 고백문으로 적합지 않다고 말합니다.  

   제가 사도신경을 예배 순서에 넣지않는 이유는 이런 신학적 논쟁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이 지나치게 함축적이어서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고백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대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공동 기도문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도신경이나 어떤 신앙고백문이 유익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없는 예배는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에는 찬성할 수가 업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했을까요? 완성된 형태의 사도신경이 만들어지기 전, 약 천년간의 신자들은 사도신경 없이 어떻게 예배드렸을까요? 그들 모두가 잘못된 예배를 드린 걸까요? 그들은 모두 이단일까요? 대체 예배에 빠져서는 안되는 순서는 무엇이고, 어떤 순서와 형식이 반드시 갖추어 져야만 진정한 예배가 될까요? 그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그것을 결정할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나눈 두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지난 주에 나눈 첫번째 대화 부분은 인간의 목마름, 혹은 인간의 영적 갈망에 대해 나눈 대화였다면, 오늘 대화는 참된 예배에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좀 뜬금이 없지만 이 대화는 첫번째 대화의 주제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목마름과 영적 갈망은 결국 올바른 예배를 통해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참된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합니다.    


   2.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상식적으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서로 대화가 헛바퀴를 돌고, 주제가 수시로 바뀝니다. 선문답처럼 매끄럽게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이 대화의 저변에는 일관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특별한 상황에 처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변해 주는 일반적인 캐릭터입니다. 끝없이 목마르고, 그래서 여기저기 방황하고, 사람들에게서 보고 배운 관습을 따라 예배드리는 그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먼저 오늘 대화의 첫 부분을 살펴 봅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자고짜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당황하면서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자, 예수님은 살짝 꼬아서 그녀의 거짓말을 지적합니다. 이전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다고 말합니다. 이쯤 되니, 여인은 당황을 넘어 멘붕이 왔을 겁니다. ‘이 사람 뭐지?’ 이 대화를 요약하면자기를 감추려는 사람모든 것을 아시는 분의 대화입니다

   여기에 참된 예배의 전제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기 스위치처럼 껐다 켰다를 반복합니다. 어떤 때는 꺼버리고, 어떤 때는 켭니다. 일상 생활을 할 때는 완전히 꺼버리고, 교회 오거나 예배 시간이 되면 잠간 켜둡니다. 일이 잘 풀려나가면 꺼두었다가 위기가 찾아오면 서둘러 킵니다. 평소에는 주님께 자가 삶을 완전히 감추고, 자신의 죄와 연역함과 부끄러움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지요.

   여러분,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면,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앞에 있는 듯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마리아여인처럼,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앞에서 나를 감추려고 합니다. ‘아마 모르실거야, 내가 깊이 숨겨둔 잘못은밀하게 감춰둔 생각은 모르실 거야’  ‘내 좌절과 슬픔은 모르실 거야, 내 꿈과 내 야망은 모르실 거야….’

   우리는 자주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을 꺼둡니다. 주님을 제껴둡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모르실 것이라고 전제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내 어떤 부분은 감출 수 있고,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거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 대해 모르는게 있다면, 그분은 주님이 아니시겠죠. 여러분, 예배란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앞에 앉아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앞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3.

   그 다음 대화 부분을 살펴 봅시다. 자기의 모든 것을 아는 분 앞에서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자 사마리아 여인이 화제를 엉뚱한 데로 돌립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대체 어디서 예배드려야 합니까?” 느닷없이 예배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그리심산과 유대 지역에 있는 시온산을 거룩한 산으로 여기고, 이 두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가 역사 속에서 더렵혀지자  유대인들은 오직 시온 산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 전통을 따라 그리심 산에서 예배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배를 어디서 드려야 올바른 예배가 되는가 하는 문제로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따라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여인은 어디서 예배  드리는게 옳으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장소나 형식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 두번째 대화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예배의 외적 형식에 집착하는 사마리아 여인  예배의 본질과 태도를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예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교회의 예배는 거의 묵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끝나는 전통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경배와 찬양 운동이 나타나면서 소위 찬양예배라는 새로운 형식의 예배가 등장합니다. 교회들마다 찬양팀을 조직하고 찬양예배가 생겨나더니 급기야는 주일예배 형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충격이 한국교회에 예배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성가대 중심의 전통예배를 고집하고, 찬양팀 중심의 현대예배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이민 교회의 상황은 더 심각했는데, 이민 1세대 기독교인들이 전통예배의 경험만을 가지고 이민을 왔기 때문에, 찬양예배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을 많이 겪었는데, 이것은 세대 갈등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심지어 어떤 교회는 전통예배냐 찬양예배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가대 특송 후에 박수로 화답하는게 옳으냐의 문제로 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배우고 자란 교회의 환경을 따라 영향을 받고 익숙해진 예배 형식을 올바른 예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이런 갈등들은 사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 사이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게 옳다, 시온산에서 예배하는게 옳다고 주장하며 갈등하는 상황과 정확히 같은 현상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같은 예배에 대한 대립과 갈등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예배의 형식과 순서는 중요합니다.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작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배의 본질을 놓친다면 예배 형식, 예배 순서, 예배 장소가 다 무슨 의미가 이겠습니까? 반대로  예배의 본질을 지킬 수 있다면 아무리 엉성한 예배 형식, 예배 순서일지라도, 아무리 초라한 예배 장소일지라도 좋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본질이 무얼까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God is spirit)는 것입니다


   4.

    여기 오늘 메시지의 결론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참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기 때문입니다. 마치 육신을 가진 분처럼, 자꾸 공간에 가두고 형식에 가둡니다. 내가 숨기면 숨길 수 있고 주님은 아마 모르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이 모르는게 있을까요? 하나님이 영이심을 믿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닌다.  

   첫째,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감추고 숨기고 거짓으로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 앞에서 자기를 감추려다가 감출 수 없음을 알게 되는데,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이상 감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때, 역설적으로 사람은 해방감을 느낍니다. 더구나 주님은 내 모든 것을 알면서도 판단하거나 지적하지 않습니다사람은 모든 것을 알지만 판단하지 않는 이런 환경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둘째, 공적 예배가 나에게 값진 시간이 됩니다. 목회하면서 주일 예배 오시는 분들이 다양한 동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습관처럼, 어떤 분은 의무감에, 어떤 분은 사람을 만나러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심을 진정으로 믿으면, 신령한 마음과 진정한 마음이 생겨 납니다. 예배 형식이나 순서나 장소 같은 문제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의식할 수록, 별거 아닌 예배의 작은 순서들에서조차 의미와 가치를 느낍니다. 그러면 예배가 달라집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째, 일상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공간이나 시간에 갇히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너머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십니다.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일을 할 때나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영이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거기가 예배의 자리든지 예배가 끝난 일상의 자리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부디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거짓 없이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실 수 있길 바랍니다. 또 공적 예배 시간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멋진 경험을 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도 영이신 하나님을 항상 느끼고 의식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자들을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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