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le_worship_02.gif
총 게시물 211건, 최근 0 건

고난을 겪을 때

글쓴이 : admin 날짜 : 2018-02-27 (화) 11:55 조회 : 138

사순절 두번째주 

고난을 겪을 때

시편 Psalm 25:1-5 / 2018225

 


   들어가는 말

   이번 주에는 유독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는 교우 분들의 소식을 많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무겁고 심지어 아프기까지 하면서,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괴로울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밖에 없는데, 좀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정된 설교 본문이 지금 우리 교우들의 상황과 맞지 않게 느껴졌고, 그래서 오늘은 강해 설교를 잠시 멈추고 고난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있죠. 틀림없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정말 고난이라는 파도와 씨름하며 나아가는 끝없는 항해인 것 같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든 적게 배운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컴퓨터 엔지니어든 시골 농부이든, 잘 생긴 사람이든 못 생긴 사람이든, 심지어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든 신앙이 없는 사람이든,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이 면제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고난이 다른 고난보다 더 힘들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고난을 겪고있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고난을 겪고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 본문 시편 25편은 다윗의 시편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절의 첫 마디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합니다. 문학적인 완성도도 높고, 그 표현도 매우  예술적이지만, 사실 이 시편이 소중한 이유는 고난에 대처하는 가장 바람직한 모형을 보여주고, 고난을 가장 온전하게 다루는 영적인 방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을 때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다윗은 첫문장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에 담긴 다윗의 고통의 깊이를 느끼실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배신을 했습니다. 아들의 군대가 아버지에게 칼 끝을 겨누고 궁으로 쳐들어 오자, 부하들은 반란군을 제압하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간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을 잃을까봐 궁을 버리고 나옵니다. 그날 밤, 궁 밖에서 멀리 궁을 바라보며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모두를 물리치고 홀로 남아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종일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우선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하필 나일까, 내가 무얼 잘못 했길래, 다들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 그런 질문들이 떠오르기 마련이죠. 만약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믿음으로 살아왔다는 자의식,  공로심이 있으면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 라는 질문은 일종의 함정과 같습니다. 의식적으로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결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좌절과 분노만 일으킬뿐, 오히려 끝없이 무력함에 빠트립니다. 사실 왜냐고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플로리다에서 총기 사고로 자식을 잃은 사람들,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는데 폭격을 받아 가족을 잃은 시리아인들, 어린 아이가 불치병으로 죽고, 모든 걸 내려놓고 험지로 떠난 선교사 가족들이 교통사고로 모두 죽습니다. 왜입니까? 대체 왜? 그러나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을 때는라고 질문하기 보다는 어떻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을 쓴 한 신학 교수는 가족들과 함께 어떤 컨퍼런스에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음주 운전자가 모는 차가 중앙선을 너머 정면 충돌했는데, 이 사고로 장모님과 아내와 막내 딸을 한꺼번에 잃어 버립니다. 목사로 신학자로 살면서 단한번도 일탈하지 않고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왜 내게?’ 울부짖으며 여러 해를 좌절 속에서 보냅니다. 

   그러는 동안 남은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도 엄마, 할머니,  동생을 잃은 충격에 큰 상처를 입고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채고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쓸데없이 라는 질문과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절망의 폐허 위에서 어떻게살아야 할지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답이 너무나 분명했답니다.  엄마 잃은 두 아이를 서둘러 캐어하고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주변에 갑작스런 사고나 재난을 당해 불행 속에 던져진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을 두 아이와 함께 시작합니다. ‘라는 질문에 붙들려 있을 때는 좌절과  분노만 가득했는데, ‘어떻게 살까생각하기 시작했더니 할 일이 너무 많더라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고난을 겪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씨름하지 말고,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 당연히 그 고난이 사라지고 고난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고난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고, 또 그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수가 없는 고난 속에 처해 있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발버둥치기보다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마땅히 가야할 길을 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자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주님만을 기다립니다.”    

   지금 힘겨운 일들을 겪고 계신 교우 여러분, 깊은 고난 속에 계신 여러분, 많이 힘드시겠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화도 나고 하나님께 반항심도 생기겠지만, 아무런 득도 되지 않고 해결책도 될 수 없는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기보다, 조용히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주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내가 지금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내 영혼이 주님만을 기다리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겐 고난을 없애는 방법을 아는 것보다 고난을 잘 겪는 방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없애는 방법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지만, 고난을 잘 겪는 방법은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잘 겪어내면 고난이 쉽게 사라져 버릴 때보다 우리 영혼에 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고난 겪는 이웃을 곁에 두고 있는 이들에게 

   이번에는 고난을 겪는 이웃을 곁에 두고 있는 분들에게 드리는 권고입니다. 우선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내가 고난이나 불행한 일을 겪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생각이 사라지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찌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런 말이나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태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종종,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재난이나 큰 사고로부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후에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이신건가요? 물론 목숨을 건진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 해야 할 일이고, 희생자 가족들이 겪는 상처와 고통을 헤아리며 함부로 그렇게 말해선 안됩니다. 그게 오히려 신앙인의 도리가 아닐까요? 

   내 이웃은 고난을 겪는데 나는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내 주변 사람들은 사고로 죽거나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나는 그재난을 피하게 되었다면, ‘~ 다행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겪고 고난을 당하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고, 그래서 정말 감사하다면, 고난과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해 뭔가 해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우리를 고난에서 피하게 해주시고, 재난에서 건져주신 이유가 아닐까요? 

   여러분, 주변에 고난을 겪는 이웃이 있다면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서툰 위로나 의무감에서 나온 형식적 위로는 그만 둡시다.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서 당황합니다. 섣불리 나서서 혹시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죠. 그런데 이런 것은 핑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심으로 고난을 겪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면 무얼 해야할지, 어떻게 도와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강도만나 피흘리고 있는 사람 곁을 지나간 사람은 대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 이렇게 셋이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그냥 지나칠만한 합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신분상 피를 만지면 안되는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그들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나귀에서 내려서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까지 데려다가 돈까지 주며 치료하도록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성경은 단 한가지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앞의 두 사람과 달랐던 점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베푼 모든 행동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Sympathy’라고 적었지만, 헬라어 본문의 의미는 ‘Compassion’이 더 적합합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sympathy)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느끼는 연민의 마음이 바로 ‘Compassion’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공통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을 품을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경과 앉은 뱅이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을 때, 중풍병자와 나병환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을 때 치유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날이 저물도록 말씀을 듣다가 먹을 것도 없이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분의 손길보다 진심으로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분의 마음이 훨씬 더 귀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중보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아름다운 신앙 행위입니다. 따라서 중보기도의 효능이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웃이 가진 고난과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진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나오는 말

   고난을 겪는 분들과 고난을 겪는 이웃을 두고 계신 분들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 되는 것은 아니며, 고난 없는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생의 고난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인생에 대해서 어떠한 장담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어떤 고난을 얼마나 더 겪어야 우리의 항해를 마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되 겸손하고 또 겸손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기독교 신앙인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고난을 겪으심으로 이 세상 그 누구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 멈추지 않고, 고난을 이기고 부활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첫째, 고난을 피하지 않는 것, 둘째 십자가를 지고 고난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것, 세째,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고난을 이기고 부활하는 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무리 힘겨운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심지어 그 고난이 우리를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절망의 끝자락까지 이끌고 갈지라도, 내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끝까지 주님을 기다리며 사랑의 길, 공감의 길, 자비의 길을 걸어 가시는 복된 성도님님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 (체크하면 글쓴이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쪽의 글자를 입력하세요.